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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체육회 정장안(55) 감독은 한국 여자세팍타크로의 산증인이다.세팍타크로 종목이 국내에 생소하던 1990년대 직접 종주국인 태국에서 연수를 받고 국내에 세팍타크로를 도입했다.지난 1997년에는 국내 최초의 여자고등부 팀인 한일전산여고 세팍타크로 팀을 창단했고, 초대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현재는 경남체육회 감독과 경남세팍타크로협회 전무이사로 활동 중인 정 감독을 만나 20여 년간 함께 한 그의 세팍타크로 인생을 들어봤다.군대에서 세팍타크로 접하며 바뀐 인생정 감독은 원래 하키선수 출신이다.그는 하키 명문 김해고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재학 시절 청소년대표로 발탁될 만큼 기량도 탁월했다. 이후 부산 동의대로 진학한 그는 많은 실업팀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운동보다는 더 큰 미래를 위해 미련없이 군 복무를 선택했다.1985년 ROTC 23기로 임관한 그는 11년간 군대 생활을 했다. 세팍타크로를 처음 접한 것도 군대에서였다. 그는 "국군체육부대(상무)에서 선수관리 업무를 맡았는데, 그때 대한체육회에서 세팍타크로 종목을 보급 중이었다. 군대에서는 그런 종목이 있구나 하는 정도였고, 제대 이후 본격적인 인연이 닿았다"고 설명했다.정장안 경남체육회 세팍타크로팀 감독.제대 이후 한일전산여고에서 체육 교사로 근무 중이던 그에게 대한체육회에서 연락이 왔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 대비해 세팍타크로 종목을 키우고 싶은데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큰 관심이 없어 거절했지만, 대한체육회와 대한세팍타크로협회 관계자가 직접 정 감독을 찾아 설득했다.그는 "당시 나조차도 세팍타크로 종목이 생소했는데, 팀을 만들자고 해 당황했다"며 "학교에서도 한 번 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해 1997년 9월 우리나라 최초로 여자팀인 한일전산여고가 탄생했다"고 설명했다.정 감독은 국비 지원을 받아 태국에서 6개월간 지도자 연수를 받고 1998년에는 국가대표팀 감독도 맡게 됐다.그는 "국가대표팀이라 해도 우리 선수가 전부였을 정도로 열악했다. 1997년 전국 세팍타크로 선수권대회가 열렸는데 여자부에서 우리 팀만 참가했다. 상대가 없어 남자팀과 이벤트 경기를 하고, 우리 팀이 A, B팀으로 나눠 경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세팍타크로 종목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종목이다. 무술 동작을 연상케 할 만큼 난도가 높은 발차기를 구사해야 하고, 족구 공보다 작은 공을 받아넘겨야 하니 여자 선수들에겐 여간 힘든 운동이 아니다.그는 "일반 학생을 선수로 키워내는 게 가장 어려웠다. 세팍타크로 공이 생각보다 아파서 도중에 못 하겠다고 뛰쳐나간 선수가 있는가 하면, 주위에서 무슨 그런 운동을 하느냐고 핀잔을 듣는 경우도 많았다"면서 "지금은 아시안게임을 통해 세팍타크로 종목이 널리 알려졌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여자 선수들이 공만 넘겨도 국가대표가 되던 시절이었다"고 웃었다.정장안 경남체육회 세팍타크로팀 감독./박일호 기자15년 넘게 국가대표팀 맡아한일전산여고를 시작으로 창원전문대, 경남체육회 팀을 연이어 창단하며 연계육성을 완성한 정 감독은 2002년 부산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도 국가대표팀을 맡았다.그는 팀 이벤트와 서클 이벤트 종목에서 동메달을 따내며 지도력을 인정받았고, 15년 넘게 여자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활약했다.올림픽 종목이 아니어서 가장 권위 있는 대회로 평가받는 아시안게임만 그는 4번을 경험했다. 부산을 시작으로 도하, 광저우, 인천 아시안게임까지 그는 여자대표팀 사령탑을 지냈다.그는 여자세팍타크로가 아시아 상위권에 설 수 있었던 비결로 강도 높은 훈련을 꼽았다.현재 국내 여자세팍타크로 선수는 120여 명에 불과하다. 여자고등부 8개 팀, 여자대학부 4개 팀, 여자실업팀 7개 등 모든 팀을 합쳐도 20개가 되질 않는다.이런 현실에서도 우리나라가 아시아에서는 손꼽히는 세팍타크로 강국이 된 데는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그의 지도 철학이 한몫했다.그가 지도하는 팀은 새벽, 오전, 오후, 야간 등 하루 4타임 운동을 소화한다. 국가대표팀도 예외는 아니다.정 감독은 우리나라가 뒤늦게 출발한 만큼 태국이나 말레이시아 등을 따라붙으려면 훈련 이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강조한다.그는 "아시안게임에서 아직 금메달을 획득하지 못했지만, 은메달, 동메달을 따낸 데는 다른 나라보다 많은 훈련량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아직 정상의 자리에 서지는 못했지만, 지금처럼 꾸준하게 훈련한다면 아시아 정상에 서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정장안 경남체육회 세팍타크로팀 감독.선수층이 얇다 보니 다른 종목보다 국가대표가 될 가능성도 크다. 조금만 기량이 뛰어나면 충분히 국가대표가 될 수 있는 종목이기에 그는 선수들에게 항상 국가대표의 품격도 강조한다.그는 "국가대표는 세계 각지를 돌며 대회에 참가하기 때문에 기량 이외에도 기본적인 인성이나 어학능력도 갖춰야 한다"면서 "특히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들은 학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어학 수준은 최하위여서 대표팀은 물론 고교 선수들에게도 어학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그래서 한일전산여고 선수부터 대표팀에 이르기까지 세팍타크로 선수들은 훈련과 마찬가지로 영어 공부에도 공을 들인다.정 감독은 "지금도 고교 선수들은 매일 단어장을 외우게 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단어 시험도 친다"면서 "꾸준한 공부 덕에 세팍타크로 선수들은 대부분 기본적인 회화 능력은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선수들에게만 품격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정 감독은 항상 솔선수범하는 지도자로 유명하다. 그는 매일 아침 7시면 운동장에서 선수들을 기다린다. 전날 과음을 해 감독님이 분명히 늦을 것이라는 선수들의 기대는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그는 "지도자는 선수들에게 항상 모범을 보여야 하고, 거울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카리스마를 발휘할 수 없고, 선수들을 이끄는 데도 지장이 생긴다"고 말했다.경남의 공격수인 김민정이 강력한 롤링킥 공격을 시도하고 있다.경남 세팍타크로 부활 위해 남은 지도자 인생 걸 것그는 한국 여자세팍타크로의 1세대로서 종목 활성화에 이바지한 공로로 지난달 대한체육회에서 주는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정 감독은 세팍타크로 종목의 산실이었던 경남이 최근 들어 다른 지역보다 팀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그는 "고성군청에서 남자팀 해체를 선언하면서 경남체육회 팀으로 운영되고 있고, 탄탄한 연계육성으로 성장하던 여자팀도 최근 들어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관심이 있는 지방자치단체에서 팀 창단을 해준다면 명실상부한 전국 최강 팀으로 키워낼 자신은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생소하게만 들렸던 세팍타크로라는 종목을 아시아 정상권으로 올려놓으며 지도력을 과시한 정 감독은 이제는 경남에만 집중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지난해를 끝으로 대표팀 감독직도 내려놓은 정 감독은 경남 세팍타크로의 부활을 넌지시 이야기했다."이전에는 대회에 나갔다 하면 금메달을 챙겨오기 바빴는데, 요즘은 금메달은커녕 메달이라도 땄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에요. 제 고향이 경남이기 때문에 경남 세팍타크로가 다시 한 번 이전 명성을 찾을 수 있다면 남은 지도자 인생을 모두 걸어볼 생각입니다."하키 선수 출신으로 세팍타크로 명장이 된 정 감독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아 보인다.
16.04.26."연극을 하는 이유요?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요."지난달 31일부터 이달 10일까지 김해에서 열린 '제34회 경상남도연극제'에서 연출상, 연기대상, 희곡상 등 개인 3관왕과 대상까지 휩쓴 진주 극단 현장의 고능석(48) 대표를 지난 15일 함양문화예술회관에서 만났다. 고 대표와 현장은 지난 15일과 16일 이틀간 함양에서 대상작 <강목발이>를 선보였다.이날 만난 고 대표는 이번 경남연극제 4관왕에 대해 "대상작이 이렇게 많은 상을 받게 되는 일은 흔하지 않은데 이번 연극제에서 대상을 받은 것 중 가장 기분 좋은 시선은 잡음이 없었다는 것"이라며 "예년에는 대상작이 발표되더라도 일부 동업자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근데 이번에는 심사위원 만장일치에 이어 <강목발이> 공연 뒤 '이번 대상은 너희야' 하고 이야기해줘 무엇보다 기뻤다"고 활짝 웃었다.극단 현장은 이번 대상으로 수상 경력을 8회로 경신하며 경남에서 가장 많은 대상을 받은 팀으로 우뚝 섰다. 이와 함께 고 대표는 2년 연속 연출상을 따냈다.고능석 대표.대상과 함께 고 대표와 극단 현장은 대한민국연극제 출전자격을 얻었다. 대한민국연극제는 34년 만에 서울팀도 참여하게 되면서 전국연극제에서 이름을 바꿨다. 오는 6월 3일 충북 청주에서 열리는 가운데 현장은 6월 13일 〈강목발이〉를 전국 경연대회에서 내놓는다.경남을 대표해 나가는 자리인 만큼 많은 공연과 연습을 소화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난 16일까지 함양에서 두 차례 공연한 것이 사실상 무대 위에서 마지막으로 연습할 수 있는 기회였다.이는 극단 현장이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장은 다른 극단들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극단에서 연극을 준비하는 것과 달리 상근배우들이 매일 출근한다. 때문에 많은 연극을 준비하고 아동극이나 마임 등도 자주 공연한다.고 대표는 "경남에서 가장 많은 대상을 받게 된 건 내 공로가 아니다. 과거 극단 현장은 동호회 수준으로 시작했으나 워낙 선배들이 좋은 연극을 많이 선보이며 자리를 잘 닦아뒀었다. 다만 지금은 배우들 직장이 극단이 됐다"라며 "전국 무대에 경남을 대표해 나가는 자리라 부담도 있다. 그렇다고 정해진 일정을 무시할 순 없는 게 우리 현주소다. 공연하는 날을 제외하고 극단원들이 하나가 돼 <강목발이>의 흡입력을 높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지난해 경남연극제에서 연출상을 수상하고서 문종근 한국연극협회 경남지회장(오른쪽)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고능석 대표.하나의 전략은 있다.그는 "보통 연극제는 많은 관람객을 유치하는 데 목적을 두는데 우리는 그 부분에 신경 쓰는 대신 극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에 소박하지만 밀도 있는 모습을 넣을 계획"이라고 전했다.고 대표가 말한 중요 장면은 굿하는 장면이다. 굿하는 장면이 웅장했으면 하는 조언도 받았지만 오히려 굿하는 장면을 더 소박하게 표현하는 동시에 배우들의 밀도 있는 대사와 연기로 풀어가겠다는 계획이다. 그래서 이번 연극제에서 연기대상을 받은 최동석 씨에게도 더 다양한 표현을 요구하고 있다.진주 극단 현장 고능석(가운데) 대표와 단원들이 익살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힘든 현실 속에서도 그가 연극인으로, 그리고 앞으로도 연극쟁이로 살아가려는 이유는 뭘까?고 대표는 잘 살려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며 이렇게 말했다."예전 후배에게 연극을 왜 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때 한 후배가 내게 말하길 좋아서라고 하더군요. 근데 그건 현실보다는 꿈을 좇는 어린 시절에나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난 행복하게 살고자 연극을 한다고 말했어요. 경제적으로 잘 살든, 가치있게 잘 살든 결국 삶을 사는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이거든요. 연극은 사회를 대변하는 가장 이상적인 예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난 잘살고 싶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연극을 합니다."
16.04.19.지난 3월 열린 제30회 전국 남녀 종별 종합 쇼트트랙 선수권 대회, 김해신명초 2학년 김보형 선수가 초등 1·2학년부 종합 1위를 차지했습니다. 500m, 1000m, 1500m에서 1위에 올라 3관왕을 차지하며 쇼트트랙 초등부 기대주로 떠올랐습니다.김보형 선수(김해신명초 2), 지난 제30회 전국남녀 종별종합 쇼트트랙 선수권 대회 초등부 1~2학년 1위를 차지한 영광의 얼굴.이번 대회는 2015년 수상 실적이 있는 선수들이 모여 펼치는 레이스로, 왕중왕전입니다. 그렇기에 이번 김보형 선수의 1위 기록은 그 실력을 가늠할 수 있을 듯합니다.김보형 선수는 평소 새벽 훈련 2시간, 오후 훈련 3시간 매일 5시간의 훈련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훈련한 성과로 이번 3관왕 기록을 얻을 수 있었고, 경기준비를 성실하게 준비했던 김보형 선수에게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제30회 전국남녀 종별종합 쇼트트랙 선수권 대회 시상식. 가운데가 김보형 선수(사진 제공 : 김보형 선수)김보형 선수에게 이번 대회 수상소감을 묻자 “매일 새벽 훈련을 열심히 한 결과”라며 “1등을 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쁘다”고 전합니다.경기 중 어려움은 없었는지에 묻자 “없다”라고 의외의 답변을 하는데요, “코치 선생님과 훈련한 그대로 경기하면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경기 시작 전 스트레칭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을 때가 더 긴장되고 힘들다”라고 하네요.훈련 중인 김보형 선수(사진 제공 : 김보형 선수)7살 때 쇼트트랙을 시작하게 된 김보형 선수, 어린 나이에 훈련하는 것이 어렵지 않으냐는 질문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니까 힘들지 않은 것 같다”라고 야무지게 얘기합니다.훈련 중인 김보형 선수, 오른쪽 마지막.(사진 제공 : 김보형 선수)김보형 선수는 “심석희 선수처럼 누구나 인정하는 멋진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가 되는 것이 원래 꿈이었다. 현재 함께 훈련받는 같은 팀의 김건희(만덕고) 언니가 2016·2017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종합 3위로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태릉에서 훈련받는다. 꼭 나도 건희 언니처럼, 뛰어난 국가대표 선수가 되어 가족의 자랑이 되고 싶다”라며 당찬 포부를 밝혔습니다.김보형 선수와 환상의 짝꿍, 엄마의 즐거운 한 때.쇼트트랙 대회는 대부분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열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쇼트트랙 선수들 역시 수도권에 편중되어 있습니다. 경남에서 훈련하면서 경기를 위해 집을 떠나 생활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경남에서 귀한 스포츠 꿈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주위의 아낌없는 격려를 좋은 양분으로 삼아, 김해와 경남을 대표할 차세대 스포츠 스타의 탄생을 예감해 봅니다.
16.04.15.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는 팽목항, 학살 피해자들을 위한 위령제 무대, 절 마당 오색등 아래. 위로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춤을 추는 이가 있다. 그녀는 스스로 춤을 '보시(자비심을 바탕으로 남에게 무언가를 베푼다는 뜻의 불교적 용어)' 한다고 말한다.김태린(47) 원장은 올해부터 민예총 진주지부 신임 지부장으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그녀가 운영하고 있는 나래춤예술원에서 편안한 연습복 차림의 김 원장과 마주 앉았다. 학원생들이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라 학원은 무척 조용했다. 듣기 좋은 음악만이 빈 연습실을 채우고 있었다.스물다섯에 만난 무용김 원장은 다른 이들에 비해 무용을 늦게 시작한 편이다."사실 학창시절에 제일 하고 싶었던 건 의상디자인이었어요. 그런데 성적이나 여건이 안 되어서 대학에 가지 않았어요."무용을 만나기 전에는 진주 '큰들'에서 놀았다. 당시 '놀이판 큰들'이라는 이름이었던 '예술공동체 큰들'에서 풍물놀이를 했다."1988년에 놀이판 큰들에 들어갔어요. 그때는 큰들도 지금처럼 체계적이지는 않았어요. 풍물패를 하던 사람들이 사회에 진출해서 단체를 만들었는데, 저는 사물놀이, 마당극 같은 걸 선배들하고 했었죠."김태린 나래춤예술원장.우리 민족 문화에 흠뻑 빠져 지내던 그 시기에 김 원장은 자신이 어떤 것에 매력을 느끼는지, 삶의 방향을 어디로 향해야 할지 깨달을 수 있었다."풍물 공부를 잠시 하면서 한국 문화, 민족 문화를 직접적으로 체험한 거죠. 그렇게 하다 보니 앞으로도 내 속에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그때 상황으로서는 먹고사는 문제와 정체성을 찾는 문제는 별개의 것이었다. 김 원장은 직장에 다니면서 고민을 이어갔다. 그리고 뭐든지 접하고 배웠다."직장에 다니는 건 그냥 일인 거고, 앞으로 제 평생을 걸만한 것이 무엇일지 일을 하면서도 항상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24반무예(무예도보통지: 조선 후기 무예 훈련의 기본 법칙)도 배우고 택견도 하고 풍물패 청년반 활동도 했고요. 동아리 활동도 하고 미술도 배웠죠. 우리나라 문화 쪽으로 항상 관심을 두고 있었어요. 그러다 민속예술보존회에서 직장인과 일반인들을 위한 한국전통무용 강좌를 연다기에 갔어요. 거기서 무용을 만났는데 무용이 내 인생을 걸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인생을 걸기로 마음먹었는데 남는 시간에 하는 취미처럼 무용을 하는 건 김 원장 성격에 맞지 않았다. 먼저 대학 졸업장이라는 라이선스를 따기로 마음먹었다. 안정적으로 직장에 다니던 딸이 갑자기 무용을 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했을 때, 가족의 반응은 어땠을까."제가 2남 2녀 중 막내예요. 참 다행인 게 어머니께서 제가 남들 결혼하는 나이에 무용을 배워서 대학에 가겠다고 했을 때 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지금도 제가 굉장히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어요. 엄마가 하지 말라고 하셨으면 못 했을 거예요. 왜냐면 엄마가 돈을 주셔야 할 수 있었으니까요.(웃음) 어머니가 선뜻 '그래 해봐'라고 하셨을 때 깜짝 놀랐죠. 공부를 제가 조금만 할 줄 알았는데 자꾸 공부한다고 결혼도 안 하니까 그때 괜히 하라고 했다며 후회를 하신 적도 있는데요.(웃음) 믿어 주신만큼 번듯하게 보답하고 싶은데 '번듯'과 '보답'이 아직은 안 되고 있어요. 여전히 진행 중이죠."올해로 12년 차 나래춤예술원김 원장은 부산에서 입시 준비를 했고 동아대 무용학과를 졸업했다. 하고 싶어서 시작한 무용이기에 당연히 재미가 있었다. 곧바로 대학원에도 진학해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먼저 짚고 가면 대학원에 들어가긴 했는데 졸업하지는 않았어요. 공부를 하다 보니 실기도 중요하지만 문화예술 쪽 전반의 시스템에 대해서도 자꾸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무용하는 학생들이 졸업을 하고 나면 진로가 너무 막막해요. 그래서 문화예술경영 분야에 대해서도 배우면 좋지 않을까 해서 서울로 갔죠. 그때가 서른 살이었어요."두려움 없이 선뜻 낯선 서울에 갔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김 원장은 많이 지쳐있었다."어느 날부터 서울 생활이 너무 힘들게 느껴졌어요. 일도 같이 했는데 공부와 병행하려니까 몸과 정신이 많이 지치더라고요. 그래서 휴학을 하고 진주에 와서 1년을 쉬었어요. 쉬고 나서 복학을 하고 3학기를 시작했는데 진주와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면서 학교를 다녔어요. 그 생활이 힘들었던 데다가 그때 문득 이 공부를 해서 내가 끝을 보려면 유학을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짧은 생각이었을지 모르지만 당시에 그 길이 너무나 멀게 느껴졌어요. 당장 춤을 추고 싶기도 했고 또 부모님에게 의지하는 게 스스로 더 이상 용납이 안 돼서 대학원을 중도에 포기했죠."돌아온 김 원장은 진주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했다. 작게라도 연습 공간을 갖고 싶다는 마음은 늘 품고 있었고 또 춤을 가르칠 수도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김 원장의 학원은 '춤으로 여는 세상'이라는 이름으로 2004년에 문을 열었다."그때는 유치원생, 초등학생 같은 어린아이들도 올 수 있는 학원으로 시작했었기 때문에 무겁지 않고 친근한 이름으로 지었었죠. 이제 아이들 수업은 하지 않고 있어요. 나래춤예술원으로 이름을 바꿨고 중고등학생 이상부터 가르치고 있어요. 중고등학생들은 어른들하고 같이 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요. 입시 준비하는 중고등학생이랑 성인들이 주로 학원에 와요."나의 춤은 '위로'김 원장은 지난 3·1절 진주성 앞에서 살풀이춤을 췄다.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파기를 촉구하고 3·1절 정신을 기리는 '301인의 아리랑' 행사에서 공연을 한 것이다. 김 원장은 자신의 몸짓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고 했다. 그녀는 이제 다른 사람을 위해 춤을 춘다.용화사 초파일 법회 후에 펼친 헌화무 공연./사진 제공 김태린"20~30대에는 사실 춤을 추는 것이 나를 위한 거였어요. 제가 만족하고 싶었고 제 정체성을 찾고 싶었었죠. 그런데 40세가 넘고 나서 내가 춤을 추는 이유가 뭘지 생각해봤어요. 나는 왜 지금껏 춤을 추고 있는가. 그때 춤은 내가 추지만 내 춤은 보는 자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 어떤 사람을 위해 춰야 하는가. 그건 위로받아야 할 자였어요. 그 후로는 그런 자리에서 요청이 들어오면 두말하지 않고 가서 제가 할 수 있는 몫을 하죠."무용을 업으로 시작했을 때에는 어떤 춤이냐를 막론하고 두루 습득을 하는 것이 먼저였다. 어느 시점이 지나고 나면 춤을 추면서도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온다. 물론 무용 분야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김 원장은 자신이 추는 춤은 주로 '의식무'라고 했다. 나쁜 기운을 풀기 위한 살풀이, 넋의 원한을 풀고 극락으로 천도하기 위한 '지전무', 양손에 바라를 들고 추는 춤으로 악귀를 물리치고 마음을 정화하는 의미를 담은 '바라춤' 등이 이에 해당한다. 김 원장은 이런 의식무를 바탕으로 '위로무'를 춘다.그녀의 춤에는 종교적인 색도 드러난다. 춤으로 아픈 자들을 위로하는 것은 종교적인 신념을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그것은 내가 살아있는 이유를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저는 불자이기도 해요. 불교에서는 나를 알라고 하고, 나를 찾으라고 해요.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만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삶을 더불어 살고 남을 복되게 하는 것이 그 이유라고 생각해요."김 원장은 유심히 보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했다."처음에는 기술이 중요해요. 그건 테크닉인데 테크닉은 연마하면 돼요. 그렇지만 위로받을 자를 위한 마음을 충분히 담지 않으면 춤의 깊이가 달라져요. 다른 이의 슬픔과 아픔을 무심히 보지 않는 마음. 평소에 그런 마음이 있어야만 제대로 표현할 수가 있어요."김 원장이 늘 위로무만 추는 것은 아니다. 부산지방법원에서 춤을 췄던 에피소드에 대해 얘기했다."부산지방법원장님을 개인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그분이 문화예술의 가치에 대해 늘 깊이 생각하고 계시다고 해요. 부산법원 강의실에서 한 달에 한 번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 열리는데 강의 시작할 때나 강의 중간에 수강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려고 노래, 춤, 악기 연주 공연을 넣으시더라고요. 저에게 의뢰가 들어왔어요. 저는 위로무를 중점으로 활동하기는 하지만 자리에 따라서는 흥겨운 춤을 추기도 해요. 그날은 제가 진주 춤꾼으로서의 자부심으로(웃음) 진주교방굿거리춤을 췄죠."도살풀이춤./사진 제공 김태린모든 사람들에게 '춤씨앗'이 있다김 원장은 앞으로 2년 동안 민예총 진주지부를 이끌어 나간다. 정확한 계획은 아직 구상하지 못했다지만 몇 가지를 중심으로 지부를 보완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연대적인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어요. 민예총의 이름을 걸고 있지만 회원들이 다양하지 않고 회원이 늘지 않고 있죠. 특히 진보적인 민족예술 의식이 약하더라도 민예총이 아닌 타 단체나 다른 예술인들과 예술이라는 장르로 묶어서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고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부분이 좀 약하지 않나 싶어요. 이대로라면 대중성과 멀어지고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잔치가 될 수 있다는….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민예총 문을 더 부드럽게 열어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집단이 되었으면 좋겠어요."진주민간인 피학살자 합동위령제에서./사진 제공 김태린마지막으로 김태린의 바람에 대해 물었다."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는 문화가 정착했으면 해요. 그건 인간이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거예요. 저는 누구나 춤이라는 씨앗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 씨앗을 키워서 밖으로 내보이지 못할 뿐이죠. 씨앗을 계속 묻어두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는데 첫 번째, 사람들은 스스로 춤이라는 것을 어떤 형상으로 마음속에 정해놨어요. 어느 정도 이상의 퀄리티가 되어야 그게 춤이라고 생각하죠. 두 번째는 주변을 의식하기 때문이에요. 춤을 출 때 주변을 의식하니까 자기 몸인데도 자기가 쓸 줄을 몰라요. 그 두 가지만 없애면 자유로운 춤이 돼요. 우리의 움직임은 전부 춤이에요. 그런 씨앗들을 틔워 줄 수 있는 선생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춤추는 기술을 배우지 않았더라도 모든 이들이 몸짓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리드하는 선생이 되고 싶은 게 제 꿈이에요."김 원장이 말하는 '춤씨앗'은 비단 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씨앗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 늦었다고 말하는 나이에 원하는 길을 택한 본인처럼 다른 이들 역시 그런 자유로움을 가졌으면 한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다면 세상은 좀 더 그녀의 몸짓처럼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16.04.14.경찰 제복을 차려입은 이양훈(45) 경위가 바깥에 있다 약속 시각에 맞춰 헐레벌떡 사무실로 들어왔다.“오늘도 학교에 나가 아이들 강의를 하고 왔습니다. 특히 신학기인 3월에는 아이들 만날 일이 많습니다.”경찰관이 강의? 학교? 그렇다. 그는 창원중부경찰서 학교전담경찰관팀에서 일하고 있다.2012년 학교전담경찰관 도입학교전담경찰관은 'School Police Officer'를 줄여서 'SPO'라고도 한다. 2011년 대구에서 같은 반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중학생이 스스로 목숨 끊는 일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 전국 일선 경찰서에 학교전담경찰관 제도가 도입됐다.그렇다고 단순히 학교폭력 문제만 맡고 있는 게 아니다. 초·중·고생, 혹은 학교에 다니지 않는 그 또래 아이들 범죄예방에 최우선 목적을 두고 있다. 모두 5명이 활동하는 창원중부서 여성청소년계 학교전담경찰관팀에서 이양훈 경위는 선임반장을 맡고 있다."과거에는 아이들이 범죄를 저지르면 처벌만 하고 끝냈죠. 그러다 보니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심리상담가를 붙여서 무엇 때문에 이 학생이 나쁜 짓을 하게 됐는지 살펴봅니다. 이제는 처벌이 아닌 예방이 최우선 목적입니다."이를 위해 학교전담팀은 매주 아이디어 회의를 한다. 그 속에서 탄생한 것들이 'TV출연', '1년의 편지 100년의 약속' 같은 것들이다."학교전담경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아직은 잘 모르죠. 그래서 효과적인 홍보방안을 고민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TV에 나가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적절한 프로그램이 뭘까 고민 끝에 찾은 것이 KBS 퀴즈프로그램 '1 vs 100'이었습니다. 팀원 전체가 출연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예능적 요소도 있으면서, 저희 업무를 알리는 데 적합하다 싶었던 거죠. 지난 1월에 출연했는데 이 업무와 존재를 홍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방송 후 '요즘 잘나가네'라는 전화도 많이 받았습니다. 팀원 정봉권 순경은 퀴즈에서도 최후 2인까지 오르는 선전을 했습니다. '1년의 편지 100년의 약속'이라는 것도 하고 있습니다. 형사입건되거나 학교폭력 선도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이 '1년 후 받아보게 될 편지'를 쓰는 거죠. 한 장은 자신에게, 한 장은 엄마에게 말입니다. 아이들은 '엄마' 이야기가 나오면 대부분 눈물을 쏟아냅니다."최근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른 아동학대 또한 업무 범주에 들어있다. 미취학 아동, 장기결석 학생들에 대한 전수조사에 교육청과 함께 보조를 맞추고 있다. '고성 큰딸 폭행 사망'도 이 과정에서 드러난 사건이다. 창원중부서 관할에서도 1년 가까이 결석한 초등학생의 소재 파악이 되지 않아 한때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다행히 아이 행방을 찾을 수 있었다."엄마가 금전적 문제로 수배 상태였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집에서 나가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거죠. 아이에 대한 신체적·정서적 학대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경찰이 아이 엄마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기 위해 '직장 알선을 해드리겠다'는 제안까지 했습니다. 이제는 사건 관련자에 대한 사후까지 챙기는 것이 경찰 몫이기도 합니다."여중생과 함께한 잊지 못할 삼겹살 파티이양훈 경위는 이 일을 하면서 겪었던 아이들 가운데 몇몇을 떠올렸다."여중생이 공부는 곧잘 했는데 가정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열등감 같은 게 쌓이다 보니 빗나가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희 직원들이 먼저 다가가서 소통했죠. 경제적으로 어려운 아이들에게는 30만 원 상당 물품을 지원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이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뭐냐고 물었는데요…. '삼겹살을 배불리 먹고 싶어요'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으니 정말 눈물 나더군요. 저희 직원들과 함께 삼겹살 파티를 하면서 마음을 나눴죠. 지금은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이렇듯 끈기, 그리고 진심과 정성 없이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 다른 상처를 받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처음부터 마음을 여는 아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가면 자기네들끼리 '아, 짭새들 정말 귀찮게 한다'고 해요. 결국에는 긴 시간을 두고 진정성 있게 다가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꾸 만나고, 손잡고, 또 학교 앞에서 기다렸다가 떡볶이·삼각김밥도 함께 먹다 보면 조금씩 마음을 여는 게 보입니다. 고등학교를 관둔 한 청소년은 정말 삐딱한 친구였는데요, 하루는 집에서 치킨을 시켰는데 우연히 이 친구가 배달을 온 겁니다. 이때를 계기로 조금씩 친해졌죠. 이제는 검정고시 준비도 하고, 닭집 사장이 되겠다는 꿈도 키우고 있습니다."이 경위는 지난해 7월부터 이 업무를 맡았다. 아직 1년 채 되지 않았지만 경찰생활 가운데 요즘같이 보람 속에서 일한 적이 없다고 한다."학교에서 말 못하고 끙끙 앓는 아이들에게 먼저 손 내밀어 이야기 들어주고,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을 때, 정말 벅찬 마음이죠. 형사계 업무도 했었지만 지금은 또 다른 방법으로 사람을 살리고 있는 거죠. 경찰관이 된 지 20년 가까이 됐는데요, 사실 그동안 친구들과 술 한잔 할때는 '힘들어서 때려치워야겠다'는 푸념을 종종했었거든요.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일이 특히 저한테 잘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저 역시 아들·딸을 키우다 보니 남 일이 아닌 거죠. 내 아이 일이라 생각하니 더 마음을 다해 일하게 됩니다."방황하는 아이들 마음 잘 아는 이유이양훈 경위가 지금 일에 마음을 다할 수 있는 건 어릴 적 기억이 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진주에서 나고 자랐다. 어릴 시절 남들 못지않은 혼란의 시간을 겪었다."초등학교 때 우리 집은 정말 부자였습니다. 아버지가 가구사업을 하셨는데 엄청나게 잘 됐죠. 그런데 1970년대 말 2차 석유파동 때 부도가 났고, 제가 중학교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식당 일을 하면서 단칸방에서 아들 셋을 키우셨죠. 중학교 때 학교생활도 순탄하지 않았고, 외톨이로 지내면서 방황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고등학교 가니 철이 좀 들더군요."꿈은 어릴 적부터 군인이었다. 특히 해군이 되어 먼바다를 돌아다니고픈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사관학교 시험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고, 일반대학 사학과에 들어갔다. 경찰관이 된 건 우연히 눈에 들어온 포스터 한 장 때문이었다."어머니 권유도 있고 해서 일반공무원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학교 시험 마치고 집으로 가는 중에 파출소 앞을 지났습니다. 거기서 경찰관 시험 안내 포스터를 보게 됐죠. 시험 과목 중에 국사가 있더군요. 제가 사학과라서 '이거다' 싶더군요. 그렇게 준비해 26살 때 경찰에 입문하게 됐습니다."창원으로 발령받아 파출소·지구대, 정보과, 경무과, 형사과, 기동대 등을 두루 거쳤다. 민원 현장 최일선에 있는 파출소 근무 때, 그리고 형사과 서무 업무를 맡았을 때 특히 육체적·정신적 부담이 컸다고 한다."사실 경찰 생활 초기에는 갈등이 많았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위계질서 많이 따지고, 또 화장실 청소에 커피 타고 윗분들 방 청소도 해야 하고…. 그래서 진지하게 그만둘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로 교육행정직 공부를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8살에 결혼하면서 가정이 생겨 쉽지가 않더군요. 그렇게 현실에 안주하면서 하다 보니 20년이 흘렀습니다. 학교전담경찰관을 맡고 나서부터는 군인 아닌 경찰관이 된 것에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이 경위는 현재 중1 딸, 초교 4학년 아들을 두고 있다. 아이들에게도 "친구 본인이 싫어하는 별명을 부르면 그 또한 죄가 될 수 있다"와 같은 말들을 강조한다.그는 아내를 대학 때 만나 2년간 구애 끝에 마음을 얻었다고 한다. 스스로 '순애보 같은 사랑'이라고 표현했다. 덧붙여 "지금도 변함없이 마누라를 정말 사랑한다"며 빼놓지 말고 기사에 담아달라고 강요(?)했다. 이 대목에서 함께 있던 팀원들은 묘한 웃음을 숨기지 않았고, 이 경위는 그런 팀원들을 장난스럽게 째려봤다.경직되지 않은 팀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엿보인다. 창원중부서 학교전담팀은 뿐만 아니라 조직 전체의 든든한 지원까지 받고 있다."저희 팀이 '2015년 하반기 전국 베스트 학교전담경찰팀'에 선정됐는데요, 팀원들만 열심히 한다고 된 게 아닙니다. 아이디어와 고민을 계속 이어가야 하는데 틀에 갇히면 형식에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 창원중부경찰서에서는 '이런 게 왜 필요하나'와 같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지지해주고 무한신뢰를 보내주니, 더 열정적으로 할 수밖에 없죠."어느 조직이나 그렇듯, 본인이 하고 싶다고 해서 그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이 경위는 가능하다면 지금 일에 경찰 인생 승부를 걸어보고픈 마음이 크다."정신적·물질적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제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계속 그 고민에 빠져있습니다. 좀 더 체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제도 같은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생각을 이어가는 지금 하루하루가 참 행복하네요."
16.04.05.